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케니 달글리시 (문단 편집) === [[리버풀 FC]] === [[파일:external/i1.mirror.co.uk/Kenny-Dalglish.jpg]] 1977년, [[케빈 키건]]이 [[함부르크 SV]]로 떠나게 되자, [[리버풀 FC]]는 팀의 새로운 간판이 되어줄 선수를 찾아나섰다. 이때 선수를 보는 안목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던 밥 페이즐리 감독의 눈에 띈 선수가 바로 당시 셀틱에서 뛰던 케니 달글리시였다. [[밥 페이즐리]] 감독은 당시 잉글랜드 축구계 최고의 이적료였던 44만 파운드를 투자해 달글리시를 데려왔고, 천문학적인 이적료와 간판선수였던 키건의 대체자인 이유 덕에 달글리시는 수많은 관심과 기대의 대상이 되었고, '''곧 그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게 된다.''' 달글리시는 데뷔시즌부터 리그 20골을 포함, 시즌 31골을 기록하는 등 좋은 활약들을 펼치며 팬들과 구단의 기대에 부응했고, 결정적으로 해당시즌 유로피언컵[* 現 [[UEFA 챔피언스 리그]]] 결승전에서 [[그레이엄 수네스]]의 패스를 받아 결승골을 집어넣으며 팀의 유로피언컵 2연패를 이루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. 그 다음시즌에서도 모든 대회 25골을 집어넣으며 팀내 최다 득점자로 활약하며 팀의 리그우승에 큰 기여를 했고 82-83시즌까지 한 시즌을 제외하고 전 시즌 20골 이상을 기록하는 등 엄청난 득점력을 보여주었다. 이후 유럽 축구 역사에 있어 최강의 언더독으로 불리는 노팅엄 포레스트가 유로피언컵 2연패등 대기록들을 세우며 리버풀을 압박했지만, 1980년에 팀에 입단하게 되는, 현재까지도 리버풀 역대 최다골 기록자로 남아있는 [[이안 러쉬]]와 환상적인 호흡을 선보이며 붉은 제국의 황금기를 이끌어나갔다. 기존의 달글리시-수네스와 신예 이안 러쉬의 삼지창. 리버풀 역대 최고의 수비수 앨런 한센과 최고의 풀백 필 닐 그리고 리버풀 역대 최고의 키퍼 레이 클레멘스 등의 활약 속에 리버풀은 1980년에서 1984년까지 유로피언컵 2회, 리그 우승 3연패, 리그컵 우승 3회 등을 기록하며 유럽 축구를 지배했다. 1983년에는 [[발롱도르]] 2위에 선정되기도 했으며, 1983-84 [[UEFA 챔피언스 리그|유러피언컵]]에서는 [[AS 로마]]를 상대로 [[승부차기]] 끝에 승리하며 3번째 [[빅 이어]]를 들어올렸다. 그러나 1984-85 시즌에는 [[에버튼 FC]]에게 리그 우승을 내주었고, 이후 1985년 유로피언 컵 결승전에서 터진 [[헤이젤 참사]][* 이것때문에 [[UEFA]]는 모든 잉글랜드 클럽들의 유럽 대항전 출전을 5년간 금지시켰고, 리버풀은 7년이나 출전 금지시켰다. 그것때문에 리그 우승한 에버튼은 유러피언컵에 못 나가게 되었고, [[머지사이드 더비]]는 더더욱 치열해졌다.] 이후 [[조 페이건]] 감독이 사임하자, 참사로 인해 어수선해진 팀의 분위기를 잡아줄 적임자를 찾고 있던 구단에게 팬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는 달글리시만한 적임자가 없었고 결국 선수 겸 감독의 신분으로 리버풀을 이끌게 된다. 이후 1990년에 달글리시는 은퇴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